솔직히 저는 한동안 이 문제를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진로 상담을 하러 찾아온 제자가 "인문학을 전공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을 때마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은 격려가 아니라 망설임이었으니까요. 서울대 대학원조차 전체 과정의 15%에서 신입생이 한 명도 없다는 통계를 보면서, 그 망설임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서글펐습니다.

교무실에서 마주한 대학원 공동화의 실체
진로 상담 주간마다 교무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텍스트를 깊이 읽고 역사의 맥락을 짚어내는 눈이 유독 반짝이는 아이들, 순수 이론의 아름다움에 흥분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이들이요.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이런 학생들이 "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교사로서 선뜻 응원을 건네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 복잡한 심경이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음을 최근 수치가 증명해 줬습니다. 국회 교육위원회 안규백 의원이 서울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서울대 대학원 석사·박사·석박통합 과정 총 4,265개 중 646개(15.1%)에서 신입생 등록 인원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출처: 동아일보). 7개 과정 중 1개꼴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셈입니다.
대학원 공동화(空洞化)란, 말 그대로 대학원 내부가 텅 비어가는 현상을 뜻합니다. 지원자 자체가 없거나, 합격해도 등록을 포기하는 사례가 누적되면서 연구 인력의 세대 재생산이 끊기는 구조적 단절입니다. 특히 노어노문학과 석사과정, 서양사학과 박사과정처럼 언어·역사 기반의 인문학 과정은 최근 10번의 신입생 모집에서 8번이나 등록 인원이 0명이었습니다.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 독일어 전공 박사과정 등 5개 전공도 10번 중 7번 신입생이 한 명조차 없었고요.
제가 상담했던 한 학생은 서울 소재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4년 내내 파고들었지만, 졸업 후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대학원 대신 AI 학원을 선택했습니다. "AI가 대세인 상황에서 서울대 대학원을 나온다고 취업 형편이 나아지겠냐"는 말이 그 아이만의 냉소가 아니었음을, 이 통계가 냉정하게 확인해 줍니다.
- 어문학 등 인문사회 계열 신입생 0명 과정: 195개(전체의 30.2%)
- 천문학 등 자연과학 계열 신입생 0명 과정: 142개(22.0%)
- 병리학 등 의학 계열 신입생 0명 과정: 257개(39.8%) — 계열 중 최다
- 10학기 중 5학기 이상 신입생 0명이 반복된 과정: 총 37개
학문 생태계가 무너지는 방식은 조용하고 느리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기초학문의 위기를 "취업 안 되는 전공을 선택한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해석이 사태를 가장 왜곡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문 생태계(Academic Ecosystem)란 교수·대학원생·학부생이 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식을 생산하고 전수하는 유기적 순환 구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오늘의 대학원생이 10년 후의 교수가 되고 그 교수가 또 다음 세대의 연구자를 길러내는 먹이사슬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슬의 첫 고리가 끊기고 있습니다.
한국인문학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강창우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일부 대학은 교수를 뽑고 싶어도 인력 풀이 너무 빈약해서 뽑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밝혔습니다(출처: 동아일보).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교수 자리가 좁아서 문제인 줄 알았더니, 이제는 채우려 해도 채울 사람이 없다는 거니까요.
인원 미달로 수업이 폐강되는 사례도 이미 현실입니다. 서울대 대학원은 수강 인원 2명 이하를 폐강 기준으로 두고 있는데, 유아교육전공은 지난해 실제로 폐강이 발생했습니다. 후속세대 단절이란 단지 연구자 수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시점을 넘기면 그 분야의 지식 자체를 사회 안에서 재생산할 역량이 사라집니다. 되돌리기 어려운 임계점(tipping point), 즉 한 번 넘어서면 자연 회복이 불가능해지는 분기점에 우리가 다가서고 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연구 경쟁력은 구호가 아닌 예산과 제도로 지켜진다
정부는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거점 국립대를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외형적 목표인데, 제가 직접 교단에서 보는 현실과 이 정책 사이의 간극은 솔직히 너무 큽니다. 정작 서울대 대학원조차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상황에서, 외형을 몇 개 더 늘린다고 연구 경쟁력이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국가 연구 경쟁력(National Research Competitiveness)이란 한 나라가 지식을 축적하고 새로운 학문적 발견을 산출하는 장기적 역량을 뜻합니다. 이 역량은 당장의 특허 건수나 논문 편수가 아니라, 그 지식을 생산할 연구자 집단이 지속적으로 충원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초의학, 인문학, 순수 자연과학은 응용 기술의 원천이 되는 기반 지식을 다루는 분야입니다. 이 분야의 연구자가 사라지면, 10년 후에는 빌려 올 지식조차 없어집니다.
제 생각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취업 연계형 첨단 학과에만 쏠린 예산 배분 구조를 재검토하는 것, 국립대 중심으로 기초학문 연구자에게 생활을 보장하는 연구 펠로우십(Research Fellowship)을 신설하는 것, 그리고 폐강 기준을 1명 이상으로 완화해 단 한 명의 연구자라도 학문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연구 펠로우십이란 생활비와 연구비를 국가가 직접 지원해 대학원생이 경제적 이유로 연구를 포기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안규백 의원의 말처럼 "대학원의 위기는 곧 국가 연구경쟁력의 위기"입니다. 교단에서 제자들에게 학자의 꿈을 접으라고 암묵적으로 종용하는 지금의 구조를, 저는 더 이상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서울대 대학원 신입생 0명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요?
A. 숫자만 보면 15%라 크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게 특정 분야에 집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노어노문학과나 서양사학처럼 10학기 중 8학기가 0명인 과정은 사실상 세대 재생산이 멈춘 상태입니다. 제가 교단에서 본 현실로는, 연구자 한 명이 빠지면 그 자리를 채우는 데 10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Q. 인문학이나 기초과학을 전공하면 정말 취업이 안 되나요?
A. 취업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 경험상 이 분야 졸업생들이 역량 자체가 부족한 게 아니라, 그 역량을 평가받을 구조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합니다. 러시아어를 4년 공부하고도 AI 학원을 택해야 하는 현실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입니다.
Q. 기초학문 위기를 막으려면 구체적으로 뭐가 바뀌어야 하나요?
A. 가장 시급한 건 연구자가 생활 걱정 없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국가 지원 펠로우십 신설입니다. 그다음은 폐강 기준 완화처럼 단 한 명의 연구자라도 학문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입니다. 취업률 중심의 대학 평가 지표도 손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기초의학 대학원도 신입생이 없는 이유가 뭔가요?
A. 의대생 대부분이 졸업 후 임상 취업이나 개업을 선택하기 때문에 기초의학 연구자의 길로 진입하는 인원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서울대 측도 "진학 필요성을 많이 못 느낀다"고 밝혔는데, 기초의학은 신약 개발과 질병 메커니즘 연구의 토대가 되는 분야인 만큼 공백이 장기화되면 의료 연구 경쟁력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결론
진로 상담 자리에서 학자의 꿈을 이야기하는 제자 앞에서 선뜻 "해봐라"고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 망설임의 이유를 이번 통계가 너무도 명확하게 설명해 줬습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조차 기초학문 과정들이 반복적으로 텅 비어가는 현실은, 단기 실용주의에 기댄 교육 정책이 낳은 결과입니다.
학문 생태계는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되살리는 데 세대가 걸립니다. 지금 필요한 건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외형 경쟁이 아니라, 연구 펠로우십 신설과 기초학문 예산 재배분이라는 조용하지만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제가 다음 상담에서 제자에게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건넬 수 있으려면, 그 변화가 교실 밖에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